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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영화학자 자크 오몽의 <영화작품 분석(1934~1988)>(아카넷. 이윤영 옮김. 2016)은 영화 감상이 일상이 된 시대에 어떤 의미를 줄까. (<영화작품 분석>은 최근에 <영화작품 분석의 전개(1934~2019)>(아카넷. 이윤영 옮김. 2020)라는 제목으로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아래와 같은 옮긴이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영화작품 분석은 최소한 다음 두 가지 의미에서 영화 작품을 대하는 세태에 대한 저항이다. 먼저 본문(8.4)에서 저자들이 언급하듯이, 다시 볼 가치가 있든 없든 모든 영화를 무차별적으로 한 번 보고 잊어버리는 소비적 관람 행태에 맞서는 저항이며 “새로운 영화가 예전 영화보다 낫다”는 지배적인 통념에 맞서는 저항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다시 보기, 꼼꼼하게 보기, 자세히 보기는 한 번 보기, 얼핏 보기, 대충 보기에 맞서는 행위이며, 해당 영화작품의 가치를 보존하는 가장 적극적 행위 중 하나다. 영화작품 분석은 또한 특정 영화 작품에 대한 숭배 및 신화화에 맞서 영화체험을 과장 없이 인식으로 옮겨오는 탈신화화의 행위이기도 하다.
이 소비적 관람의 반대편 극단에는 과잉담론이 있다. 언제부턴가 한국에서 (기이하게도 ‘인문학’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영화담론은 상당한 과잉의 상태에 있는 것 같다. 정확한 언어의 사용 대신 과장된 빈말의 남용은 한국의 일상생활에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지만, 작은 것을 부풀리거나 극도로 거창한 담론을 영화작품과 무매개적으로 연계시키려는 경향은 영화연구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는 고도로 추상화된 인문학적 담론을 별다른 매개 없이 개별 영화작품에 직접 대응시킬 수 있다는 안이한 태도가 깔려 있다. 어쨌거나 개별 영화작품에서 벌어지는 구체적인 사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립적으로’ 전개되는 담론은 소비적 관람만큼이나 폭력적이다. 따라서 해석의 과잉, 담론의 과잉이 만들어낸 폐해를 교정하기 위해서는 실제 영화작품들에 보다 확고하게 근거를 두는 작업이 필요하며, 바로 이런 작업 중 하나가 영화작품 분석이다.
-자크 오몽. <영화작품 분석>(2016) P.13~14. 옮긴이의 말 中
옮긴이의 말대로, 한국 사회에서 영화를 감상하는 문화의 주된 형태는 소비적 관람일 것이다. 소비는 늘 새것을 좋은 것으로, 옛것을 나쁜 것으로 여긴다. 그래야 소비가 생산과 유통의 끊임없는 순환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는 일종의 리듬인데, 짧은 호흡의 리듬이다. 떠들썩한 오늘의 영화는 금세 시들한 어제의 영화로 탈바꿈한다. 영화 담론 역시 그 리듬에 편승하거나 앞장서 리듬을 주조한다. 영화 소비자들이 ott의 알고리즘에 영향을 주며 간접적으로 만들어내거나, 입소문과 소셜 미디어를 통해 직접적으로 생산하는 영화담론은 물론, 영화 저널리즘 역시 그 같은 리듬에 충실하다.
2020년에 존 포드의 영화를 특집기사로 다루거나 오즈 야스지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을 분석하는 것은 참 새삼스런 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런 영화들을 간혹 다루더라도 쏟아지는 신작의 특집기사들만큼 중요하게 배치될 리도 없을 테다. 사실 그런 상황들이 특정 주체의 문제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영화의 리듬 자체가 산업의 리듬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조적 현상이다. 영화 관람과 영화담론은 어느 때보다 넘쳐나지만 그것이 산업의 리듬에 종속돼 있는 이상 '소비적 관람'을 벗어나기는 힘들다.
옮긴이가 말하는 "영화작품에 대한 숭배 및 신화화"는 한편으로 흥미로운 현상이다. '씨네필 문화'라 통칭되는 모든 문화가 그렇진 않지만 일종의 극단화된 씨네필 문화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소비적 관람의 반대편에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동전의 양면에 가깝지 않을까. 개별적인 영화 작품을 거리를 두며 충실히 숙고하기 이전에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그런 문화는 사실은 일종의 '문화자본'에 대한 소비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하는 '문화자본'은 배제와 포섭의 경계를 만들며 계급을 재생산한다. 물론 '문화자본'은 훌륭한 전통과 기예를 전수하고 재생산하는 순기능도 있다. 하지만 씨네필의 통과의례라고 할만한, 특정한 영화작가나 작품에 대한 정해진 약호들이 있고, 그것들을 무분별한 포식자처럼 흡수하는 것이 소비가 아니면 무엇일까. 그런 약호들이 영화 공동체에서 일종의 권위로 재생산되기에 '문화자본'의 특성을 띠는 것이다. 문학적으로 좀 좋게 표현하면 그것은 눈먼 사랑에 뒤따르는 열병과 광증일 수도 있다. 그런데, 소비적 관람이 워낙 압도적인 요즘, 사실 그런 열병과 광증도 찾아보기 힘들어진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옮긴이가 소비적 관람의 반대편에 있다고 말한 "과잉담론"이 있다. 주로 '영화 인문학'같은 이름을 붙이고 통용되는 담론들이다. 그 같은 담론들은 옮긴이도 지적하는 바이지만, 대체로 충실한 영화 분석을 경유하지 않고 곧장 거창한 인문학 담론으로 이행한다. 정작 '영화의 자리'가 없는 것이다. 말하고자 하는 인문학적 명제를 뒷받침하는 레퍼런스로서 영화를 기능적으로 차용하는 것이다. 자크 오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많은 분석가에게 ‘해석’이란 말은 경멸적인 말이며, 많은 경우 ‘과잉해석’이나 자의적 해석, ‘상식을 벗어난’ 해석이라는 말과 동의어다. 요컨대 주관성의 과잉이며, 아무리 불가피하다고 해도 투사(보고 싶은 것을 본다는 뜻)나 환각이기 때문에 다소간 정당화될 수 없는 부분이란 뜻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우리로서는, 다음과 같은 점을 인정하는 것이 보다 솔직한 태도인 것 같다. 즉 분석이 실제로 해석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 해석이 창조적이고 상상력이 넘치는 분석의 ‘동력’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가능한 한 엄밀하게 검증할 수 있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해석 능력을 이용하는데 다다른 분석이 성공한 분석이라는 점이 그것이다. 물론 이것은 아주 드물게 이루어지는 이상일 뿐이다. 또한 단지 영화작품을 설명하는데 그칠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엄밀하게 사실에만 머물고자 하는 욕망과 사실을 왜곡하거나 이를 부당하게 한 방향으로 몰고 갈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자신의 분석 대상에 대해 뭔가 본질적인 것을 말하려는 욕망 사이에서 분석가가 항상 약간은 ‘진퇴양난의 상태’에 있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자크 오몽 <영화작품 분석>. P.34
자크 오몽은 영화에 내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은 영화 분석, 해석, 비평으로 나뉜다고 말한다. 분석은 객관적인 사실의 영역에 있고 해석은 주관적인 관점이 가미된다. 비평은 분석과 해석을 경유하여 가치평가의 영역으로 나아간다. 자크 오몽은 분석가들이 '해석'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만 엄밀히 말해 분석이 해석과 연관돼 있으며, 오히려 해석이 창조적이고 상상력이 넘치는 분석의 동력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크 오몽이 말하듯 분석과 해석의 변증법적 긴장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분석이 객관이라는 보호막에서 벗어나 어떤 본질적인 것을 말하는 모험을 감행하려면, 객관과 주관 사이, "진퇴양난"의 자리에서 머뭇거려야 한다. 과잉된 영화 인문학 담론은 그 객관과 주관 사이의 매듭이 헐겁다. 영화의 자리에서 주저하기보다는 섣불리 목적지로 떠난다.
자크 오몽이 강조하듯 영화를 분석하는 보편적인 방법은 없다. 그러니 분석을 넘어 해석과 비평의 영역으로 나아가기 위해, <영화작품 분석>에 제시된 텍스트 분석, 내러티브 분석, 시청각적 분석, 정신분석적 분석, 상호 텍스트적 분석을 반드시 경유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영화를 통해 무언가를 말하거나 어떤 인문학적 명제를 끌어내기 전에, 영화 안에 좀 더 충실히 머물 필요가 있다. 마치 어린아이가 세상을 천진한 호기심으로 대하듯, 영화의 결, 색채, 리듬에 경탄하며 그 공간을 살뜰히 활보하는 것.
하지만 한 가지 물음이 남는다. 영화 바깥으로 나서는 일은 단지 영화의 내적 분석 뒤에 자동적으로 뒤따르는 것인가. 자크 오몽이 언급하듯 영화는 "영화작품 내적인 것", "영화 자체의 것" 뿐만 아니라 "상징적인 것"을 다룬다. 또한 자크 오몽은 영화 분석 같은 내재적 접근과 영화에 대한 역사학적, 사회학적, 인문학적 담론 같은 외적 접근을 구별한다. 그렇다면 분석의 충실함은 단지 무매개적이고 추상적인 영화담론을 방지할 뿐 외적 영화담론의 '좋음'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엄연히 다른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영화 바깥은 단지 영화 내부의 여집합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 영화는 관객을 경유하여 바깥으로 옮겨지며 관객은 영화와 함께 살아가며, 나아가 영화를 산다. 그런 관객들이 모여 살아가는 사회에는 영화 내부의 리듬과는 다른 고유한 파동으로 여기저기 흩뿌려진 영화의 무늬가 있다. 영화의 그러한 생애주기를 온전히 규명하기 위해서는 영화 분석의 방법론만큼이나 좋은 방법론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마사 누스바움의 예술 교육 방법론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방법론들은 영화를 내적으로 충실히 분석하는 것과 상충되는 것일까. <파랑새> 이야기에서 남매가 자신들 내부에 있는 파랑새의 가치를 알아보게 된 것도 파랑새를 찾아 바깥세상의 온갖 것들을 살피며 돌아다녔기 때문 아닐까. 그러니 영화 바깥의 인문학적 담론들은 영화 분석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화 자체의 것"이 가진 진정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아래 영상은 시민의 영화관 유튜브 채널에서 자크 오몽의 <영화작품 분석>을 토대로 영화를 분석하는 방법에 관하여 다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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