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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 누스바움의 예술 감상법을 통해 영화 감상하기

시민의 영화인문학/영화교육 방법론

by 별그물 2020. 3. 14.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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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을 읽기에 앞서 마사 누스바움의 철학과 그의 교육론을 통해 영화의 교육적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본 아래 글들을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2020/03/13 - [시민의 영화인문학/누스바움의 시네마] - 예술, 감정, 정치, 교육: 마사 누스바움의 철학에 관하여

 

예술, 감정, 정치, 교육: 마사 누스바움의 철학에 관하여

세계적인 정치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의 사상적 궤적은 실로 방대하여 그것을 간략히 개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누스바움의 책은 대체로 두껍다. 가장 최근에 출판된 <정치적 감정>(2019) 역시 684 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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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4 - [시민의 영화인문학/누스바움의 시네마] - 누스바움의 시네마: 영화의 교육적 가능성

 

누스바움의 시네마: 영화의 교육적 가능성

지난 글에서는 마사 누스바움의 철학이 예술 교육의 중요성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해당 글은 아래와 같다. 이번 글을 읽기 전에 참고하면 될 것 같다. 2020/03/13 - [시민의 영화인문학/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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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에서는 마사 누스바움의 예술교육 방법론과 그것을 누스바움이 히치콕의 영화 <싸이코>(1960)에 적용한 예시를 바탕으로, '누스바움의 시네마'(이것은 본인이 자의적으로 명명한 용어이다.)라는 영화 감상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해보고자 한다.  누스바움이 제시한 것은 <싸이코>의 예시를 제외하고는 그리스 비극과 소설 등 문학에 국한된 것이기 때문에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에 맞게 이를 변주하고 보완하는 작업을 통해 '누스바움의 시네마'라는 방법론을 확립할 수 있을 것이다. 

 

내러티브적 놀이의 규칙

 

누스바움은 <감정의 격동-1. 인정과 욕망>(2015)에서 우리가 예술을 향유할때, 갖게 되는 "미학적 활동의 '잠재적 공간'은 삶의 가능성 중의 일부를 탐구하고 시험적으로 사용해볼 수 있도록 해주는 공간"이라고 말한다. 누스바움의 이러한 인식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의 맥락 안에 있다. 

 

<감정의 격동-1. 인정과 욕망> 표지ⓒ2015.새물결.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역사가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고, 시인은 일어날 법한 일을 이야기 한다. 따라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중요하다. 왜냐하면 시는 보편적인 것을 말하는 경향이 있고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라고 얘기한다. 시(그리스 비극, 서사시 등)가 역사보다 철학적이고 중요한 이유는 역사는 일어난 일만을 대상으로 하지만 시는 삶과 세계의 온갖 가능성을 그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누스바움은 그러한 인식의 연장선에서 예술이 창출하는 삶에 대한 탐색의 공간을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또한 <시학>에서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모방을 잘하며 모방을 통하여 지식을 얻는다는 점에 있다또한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어떤 모방된 모습을 보면 즐거움을 느낀다...그림을 보고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그것을 봄으로써 배우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누스바움은 그 같은 인식의 연장에서  "우리 자신의 안전이 직접적으로 위협받지 않는 안전하고 보호된 '잠재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미학적 활동은 탐구의 즐거움을 그러한 활동의 대상인 인간의 곤궁과 불충분함에 대한 탐구와 연결시키며, 그리하여 우리의 한계를 우리에게 즐거운 것으로, 적어도 덜 위협적인 것으로 만든다."(<감정의 격동-1. 인정과 욕망> P.441)고 말한다. 

 

우리가 예술을 통해 우리 삶의 가능성을 헤아려보고 심지어 우리의 연약함, 비참, 한계에 대해 기꺼이 탐색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대단한 의지나 인위적인 노력없이 그 같은 탐색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예술의 커다란 힘일 것이다. 누스바움이 이 같은 활동을 "내러티브적 놀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지난 글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누스바움은 감정이 사적인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공적이며 윤리적/정치적인 차원으로 확장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예술을 통해 삶에 대해 탐색할 수 있는 '잠재적 공간'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예술작품이 수용자로 하여금 어떤 유형의 감정을 갖게 만드느냐 이다. 누스바움은 그러한 감정의 수준과 유형을 아래와 같이 정리한다. 아래의 방법론은 '내러티브적 놀이'를 위한 일종의 규칙인 것이다.       

 

1. 캐릭터들에 대한 감정: (a) 동일시를 통해 캐릭터의 감정을 공유하는 것
 
(b) 캐릭터의 감정에 반응하는 것
 
2. ‘내포작가’에 대한 감정, 전체로서의 텍스트에 구현되어 있는 인생관.
 
(a) 공감을 통해 인생관과 그에 대한 감정을 공유하는 것.
(b) 연민을 갖고 아니면 비판적으로 그것에 반응하는 것. 이 감정은 복합적 수준의 특수성과 일반성에서 작용한다.
 
3. 나도 그렇게 될 가능성에 대한 감정. 이 감정 또한 다양하며, 복합적 수준의 특수성과 일반성에서 작용한다.
 
4. 삶이나 나에 관해 어떤 것을 이해하게 된 데 대한 희열과 즐거움의 감정.

(<감정의 격동-1.인정과 욕망>. P.490

<오이디푸스 왕>표지ⓒ2009.민음사.

 

<오이디푸스 왕>의 경우

 

누스바움은 그리스 비극인,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예로 들어 말한다. <오이디푸스 왕>을 읽는 독자는,

1-(a) 오이디푸스와의 동일시를 통해 그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발견했을 때의 황폐한 마음, 그 이후의 고통과 절망을 함께 공유한다.

1-(b)그러한 감정을 연민을 가지고 바라보거나 오이디푸스에게 임박한 몰락에 대해 공포를 느낄 수도 있다. 

 

'내포 작가'란 실제 작가와는 구별되는 것으로서, 전체 작품에 반영된 삶에 대한 인식과 인생관을 의미한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그리스 비극에서 내포 작가는 대체로 "상당히 선한 사람의 운명의 변전과 고통을 연민뿐만 아니라 공포를 갖고 바라본다". '내포 작가'는 어떤 인격이나 실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형식과 내용을 통해 구현돼 있는 의미가 독자와 만났을 때 파생되는 '구성물'에 가깝다. 어떤 작품의 의미가 작품의 형식 속에 짜여 잠재돼 있다 해도, 독자가 읽기와 해석을 통해 발견해내지 않고는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포 작가'는 '내포 독자'(작품 속에 짜여진 의미를 통해 독자에게 권장되는 수동적 수용)와 긴밀히 연결돼 있다.   

 

<오이디푸스>에서 내포작가는 선한 인간인 오이디푸스가 운명의 장난에 의해 겪는 고통과 고난을 연민 어린 시선으로 전하고 있다.

2-(a) 독자는 그러한 내포작가의 관점과 연민의 감정을 함께 공유한다. 

내포 작가의 관점과 감정에 반응하는 것은 복합적 수준의 특수성과 일반성에 따라 다양한 반응이 가능하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다.    

 

2-(b)(특수성) 오이디푸스같이 선하고 존경스러운 사람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하는 이 세계를 연민의 감정을 갖고 바라본다.

2-(b)(일반성) 인간이란 존재의 격심한 고통을 생각하며 그러한 고통을 겪는 사람에 대해 연민을 느낀다.

2-(b)(더 큰 일반성)육체적 고통을 포함해 변덕스러운 운명이 주는 온갖 고통에 노출되는 인간 삶의 취약성에 연민을 느낀다.   

 

이처럼 독자는 특수성과 일반성 사이에서, 무수히 많은 일반성의 수준을 선택할 수 있고 그에 따른 감정적 반응도 다양하다.  내포 작가는 작품의 구조속에 설계된 의미에 따라 제한적인 범위의 감정을 내포 독자에게 제안하지만, 독자는 이를 수용할 때, 일반성의 수준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작품을 능동적이고 다양하게 체험할 수 있다. 누스바움의 위와 같은 방법론이 가진 독특성은 그처럼 작품 형식의 범위 안에 있는 독자의 수동성과, 다양한 수준의 관점을 자유롭게 선택하며 작품에  반응할 수 있는 독자의 능동성을 모두 아우르는 데 있다.

 

그리고 이 능동성은 독자가 작품을 자신의 삶과 연관지어서 반응할 때 더 커지는데, 이 또한 독자가 일반성의 수준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가장 특수하게 '나'와 연관 지어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내 가족, 주변의 친구와 연관된 일, 나아가 사회적 의제와 관계된 것으로 확장할 수 있기에 하나의 작품은 독자에게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유와 감정을 유발한다.   

 

3. (특수성) 불운이 '나'와 내 가족, 주변의 친구에게 닥칠지 모른다는 공포를 느낀다.

3. (일반성)행복한 일상을 살다가 불운에 의해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남자에 대한, 보도를 보고 연민을 느낀다.  

3. (더 큰 일반성)불운으로 고통을 겪는 모든 사람에 대해 연민을 느낀다. 

 

4. 마지막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독자는 <오이디푸스>를 통해 이 세계와 '나'의 삶에 대해 어떤 통찰을 얻고 이해의 폭을 넓힘으로써, 그런 배움에 대한 즐거움의 감정을 갖게 된다. 

 

알프레드 히치콕 <싸이코>(1960) 포스터ⓒShamley Productions.

 

<싸이코>의 경우

 

누스바움은 위와 같은 방법론을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싸이코(1960)의 한 장면에 적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1. 관객은 샤워하고 있는 마리온을 보며 공포를 느낀다. 그녀에게 큰 위험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마리온에 대해 연민을 가지며 그녀에게 살금살금 다가오는 약탈자에 대해서는 분노를 느낀다.

 

2. 여성의 몸은 온갖 폭력에 취약하다. 따라서 마리온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한편 그러한 폭력에 여성이 취약함을 안다. 몇몇 상이한 일반성 수준에서 모든 여성 또는 미국 여성들을 생각하면서 이러한 감정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그런 폭력을 당하는 여성들에 대한 연민을 느낀다. 동시에 폭력을 행사하는 공격자들과 그런 사태를 초래해온 사회구조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

 

3. 만약 관객이 여성이라면 관객은 자신의 몸이 온갖 폭력에 노출될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의 몸이 그렇게 될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며 두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누스바움은 히치콕의 <싸이코>가 실제로는 관객에게 혼란을 주는 이중적 동일시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종류의 감정들도 초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카메라를 관음증적이고 공격적"으로 사용하는 히치콕 영화의 특성은 "관객을 자신의 사디즘 및 가해적 공격성과 접촉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부 관객은 마리온과 "동일시하는 동시에 그녀를 괴롭히고 싶어 한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소중한 대상에 대한 자신의 공격성을 의식하게 된다." 

 

4. 마지막으로 몇몇 측면에서 영화를 통한 위와 같은 탐색은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지만 관객은 자신에 대해 무엇인가를 배우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싸이코>에서 노만과 마리온ⓒ1960.Shamley Productions.

 

누스바움의 시네마와 영화 분석의 차이

 

비록 <싸이코>의 한 장면에 국한된 것이지만 이 같은 분석을 통해 누스바움의 방법론을 영화에 적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방법론과 기존의 영화 비평이나 분석의 (우열의 관점이 아닌) 차이점을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 비평에 있어서 정신분석적 관점은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히치콕의 영화가 특히 그렇다. 누스바움은 위의 분석에서 관객이 마리온에게 동일시할 거라고 전제한다.  당연히 관객이 노만에게 동일시할 가능성은 없기 때문에 노만(안소니 퍼킨스)에 대한 언급은 없다.  

 

반면에 슬라보예 지젝이 자크 라캉의 정신 분석학을 바탕으로 히치콕의 영화 세계를 분석한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에서 지젝은 책 3부(개인: 히치콕의 세계)의 상당 부분을 <싸이코>에서 왜 관객들이 노만에게 동일시할 수 없는지를 설명하는데 할애하고 있다. "히스테리는 타자의 욕망에 대한 주체의 욕망의 동일화로 정의된다. 반면 도착은 대상-사물 자체의 불가능한 응시와의 동일화를 포함"하기 때문에 관객들은 마리온(히스테리적 주체)에게 동일시할 수는 있어도 노만(도착적인 주체)에게 동일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지젝에 따르면 노만은 법과 도덕과 같은 상징계에 편입되지 않고 상상계적 거울단계에 머무르고 있는 인물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같은 기존의 범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관객은 상징계적 좌표에 노만을 위치시킬 수 없다. 즉 어떤 인물이 개연성과 논리의 차원에서 어느 정도 납득이 되어야 관객은 그 인물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동일시할 텐데 노만은 속을 알 수 없고 행위의 근거를 짐작할 수 없으며 지나치게 의뭉스러운 인물인 것이다. 사실 복잡한 정신분석학을 경유하지 않아도 관객이 노만에게 동일시 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것은 일상적인 관람의 체험에서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비평이나 분석은 영화의 내적인 형식과 구조에 강조점을 둔다. 영화의 플롯, 캐릭터, 연기, 촬영, 편집, 미장센, 사운드, 작가주의, 이데올로기, 장르적 특성 같은 지점들이 그 같은 탐구 대상이다. 누스바움이 위에서 언급한 용어를 빌리자면 지젝의 <싸이코> 분석은 관객이 노만에게 동일시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며 내포 작가-내포 관객의 차원을 짚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관객의 수용에 대한 탐구라기보다는 <싸이코>에 내재된 정신분석적 진실에 대한 설명에 가깝다.

 

비평이나 분석을 통해 관객은 영화를 내적으로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지만 일부 비평이나 분석은 영화에 내재된 단 하나의 '내적 진실'이 있다고 말하며 그것을 찾는데 많은 에너지를 쏟게 한다. 물론 지젝은 위의 저작에서 <싸이코>에 대한 열린 해석의 가능성이란 전혀 전복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열린 해석'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은폐하고 있는 닫힌 구조를 찾는 것이 전복적이라고 말한다. 작품의 내적 구조를 해석해내는 것이라면 경우에 따라 지젝의 언급이 타당할 수도 있다.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표지ⓒ2001.새물결.

 

다만 그런 분석이나 비평의 방식은 관객을 자신의 자원이나 경험을 통해 능동적으로 영화를 체험하는 지평으로 안내하는 측면에서는, 한계를 가진다는 것이 명백하다. 특히나 그런 해석이 영화의 '정답풀이' 같은 것으로 오용된다면 그것은 다양한 체험의 '잠재적 공간'을 지닌 영화를 좁은 공간에 가두는 일이 될 것이다. 누스바움의 방법론은 지젝의 비판밖에 있는 것인데, 위에서도 말했듯이 그것은 내포 작가-내포 관객의 차원을 관객의 체험과 '행복주의'차원으로 전환시키기 때문이다. 행복주의는 누스바움이 강조하는 개념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에우다이모니아'(폴리스의 시민으로서의 행복)의 측면에서 나와, 내가 살아가는 세계를 사유하고 염려하는 태도를 말한다.

 

우리는 '좋은 삶', 행복의 견지에서 내 주변과 세상사를 돌아본다. 지젝이 <싸이코>에서 라캉의 '실재'의 차원을 발견하고 그것이 히치콕의 형식 속에 어떻게 구현돼 있는가를 밝히고 있다면 누스바움은 <싸이코>에서 온갖 폭력의 가능성에 노출된 여성의 신체를 염려하고 그 기저에 있는 사회구조적 부조리를 성찰하게 만든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것은 영화를 대하는 서로 다른 방법론이지 어느 것이 더 낫다는 얘기가 아니다. 사회학자인 리처드 세넷의 용어를 빌어 말하자면 누스바움의 방법론은 영화의 '외향적 전환'일 것이다. 영화 안의 해석을 넘어 영화 바깥의 '좋음'을 찾아 나서는 일 말이다. 

 

좋은 삶을 위한 영화 보기  

 

하지만 이는 엄연히 하나의 미학적 매체로서 존재하는 영화의 예술 형식을 경시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누스바움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작품이 자신의 가능성에 대한 감정을 구성하는 데 성공하는 것은 정확히 형식적 특징 덕분이기 때문이다." 누스바움은 "그러한 작품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이 형식을 인간적 가능성과 연결시키지 않는 한 완전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즉 예술이 위와 같은 감정들을 구성하는 것은 '내용'때문이 아닌 '형식'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가령 독자가 <오이디푸스 왕>을 읽으며 허구적 상황이 아니라 마치 자신에게 닥친 상황처럼 실제적인 감정들을 느끼는 것은 단지 한 인간의 불행이라는 소재가 아닌 '비극'이라는 형식 때문인 것이다. 그 같은 체험의 가능성들을 탐구하는 것은 형식을 경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장르적 형식의 기능을 완전히 규명하는데 기여한다.                  

 

누스바움은 그러한 접근법이 얼핏 예술의 형식에 대한 역사적, 문화적 맥락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예술을 통해 위와 같은 감정들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해당 작품과 관련된 특수한 미학적 또는 문화적 전통에 대한 상당한 지식과 교육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가령 누스바움이 <싸이코>에 대해 언급한 '이중적 동일시'를 온전히 인지하기 위해서는 "유아적 감정의 가장 불편한 측면을 탐구"하는 히치콕 영화 전반의 장르적 특성과 내러티브에 대한 상당한 영화적 지식이 필요한 것이다.

 

또한 누스바움은 "주로 형식의 정교화에 의해 즐거움을 줄뿐 시간, 죽음, 사랑 그리고 다른 행복주의적 쟁점들을 갖고 인간적 관심사를 탐구하려고는 하지 않는 작품"이 있음을 인정한다. 고정된 카메라로 8시간 동안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모습을 담은 앤디 워홀의 영화 <엠파이어>(1964)가 그런 관심사들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반대로 "청중과의 풍부한 행복주의적 연관성 없이는 전혀 기능할 수 없는" 예술 장르(비극, 로망스, 멜로드라마, 리얼리즘 소설, 몇몇 유형의 희극 등)도 있다.

 

분명한 것은 누스바움의 방법론은 예술 형식을 소홀히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철저히 경유할 때만 온전히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폭넓은 영화적 교양은 관객을 더 풍성한 행복주의적 체험으로 이끈다. 누스바움식으로 영화를 감상하는 것, 즉 '누스바움의 시네마'는 영화가 우리네 인간적 삶과 행복, 시민의 좋은 삶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탐구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영화와 함께 살아가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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