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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감정, 정치, 교육: 마사 누스바움의 철학에 관하여

시민의 영화인문학/영화교육 방법론

by 별그물 2020. 3. 13.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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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 누스바움 <시적 정의>(2013). 궁리

세계적인 정치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의 사상적 궤적은 실로 방대하다.  학문적 주제는 정치철학,  감정 철학, 법철학, 교육, 공공정책 등으로 다양하며 이를 다루는 방법론 또한 철학, 심리학, 인류학, 문학, 음악, 동물행동학 등 학제를 넘나 든다. 하여 누스바움의 책은 대체로 두껍다. 가장 최근에 출판된 <정치적 감정>(2019) 역시 684 페이지에 달한다.그런 면에서  284페이지 정도의 분량에 그녀의 주요 기획이 잘 정리된 <시적 정의>(2013)는 누스바움에 입문하는데 아주 좋은 저서일 것이다. 시민의 영화관에서는 문학적 상상력과 공적 삶을 연결 짓고자 하는 누스바움의 기획을 차용하여, 그녀의 방법론을 영화보기에 적용해보고자 한다.

 

정치철학의 재발견  

 

그에 앞서 우선 누스바움의 기획이 가진 인문학적 맥락을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그것은 누스바움이 지성계에서 가지는 하나의 좌표이기도 할 것이다. 미국의 2008년 금융위기와 뒤이은 남유럽 재정위기는 자본주의의 구조에서 비롯되는 중대한 위기로 인식되었고 이는 인문학적으로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지적 사조의 한계를 다시금 돌아보게 했다. 거대담론이나 커다란 정치적 기획을 비판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은 한때 그러한 '거대 서사'들이 초래한 역사적 과오를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잇따른 자본주의의 위기 국면과 세계적으로 극심해지는 경제적 불평등은 그 같은 성찰을 경유하여 새로운 정치적 기획을 요청하게 된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과 같은 저서들이 커다란 대중적 주목을 받게 된 것은 그런 흐름 안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슬라보예 지젝과 지그문트 바우만 같이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사상가들이 이례적인 대중적 인기를 끌었으며 안토니오 네그리, 자크 랑시에르, 조르조 아감벤, 알랭 바디우, 에티엔 발리바르 같은 정치철학자들이 재발견된다. 그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뭉뚱그리는 것은 사실 무리한 면이 있지만 여하튼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정치를 다시금 작동시키는 기획들이 인문학적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커다란 정치적 변화의 욕구와 기대를 방증하는 것이었다. 

 

슬라보예 지젝<멈춰라,생각하라>(2012).와이즈베리

마사 누스바움의 지적 좌표 

 

하지만 한동안 이어진 그런  인문학적 관심은 요즘 들어선 좀 한산한 느낌이다. 현실정치의 교착상태 때문인지 담론이 가진 사상적 깊이가 실천적 차원으로 이어지지 않는 공허함 때문인지, 그것을 섣불리 말하긴 힘들다.  그런 흐름에서 마사 누스바움의 정치철학은 실천적인 측면에서 새로운 동력과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누스바움은 상기의 철학자들과는 달리 영미의 자유주의 전통 안에 있으며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 학파 등 고전철학을 재구성하여 자신의 철학을 전개한다.

 

누스바움의 저작은 사변적이기 보다는 소설, 시, 영화, 음악 등 다양한 레퍼런스를 차용한, 대중적인 문체로 개인의 성장과 정치적 변화사이에 교량을 건설한다.  인간을 단순한 쾌락과 고통의 단위로 보는 전통적 공리주의와 주류 경제학과 달리, 누스바움은 개개인을 풍성한 감정과 고유한 세계를 지닌 심원한 존재로 바라본다.  무엇보다 누스바움의 독특성은 기존의 철학, 심리학, 정신분석학의 전통에서 사적인 것이라 치부되는 감정을 그 철학적 토대로 삼는 것이다. 그녀는 감정이 공공적이며 정치적인 가치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누스바움은 이 지점에서 감정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치밀한 철학적 논변만큼이나 실천적인 지점에서, 어떻게 정치적인 감정을 형성할 수 있는가를 탐구한다.  문학을 포함한 예술이 가진 시적 상상력은 공감과 동일시를 통해 새로운 감정을 형성하는데, 이 감정은 개인이 좁은 자아를 벗어나 공적이고 정치적인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가령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는 감정은 지극히 사적인 것이지만 이는 타인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더 크고 멀게 확장될 수 있다. 누스바움은 시민의 '좋은 삶'을 위해 '감정'이 가진 그러한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누스바움의 정치철학은 전통적으로 도외시돼온 '감정'이라는 재료를 정치적인 차원으로 직조한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며 독특한 지점을 획득한다.

 

실천적인 철학, 교육으로 나아가다.

 

그런 점에서, 고대부터 현대까지 서구 철학사에서 감정이 지녀온 위치와 이에 대한 전복, 감정철학의 재구성을 꾀하는 <감정의 격동>3부작(인정과 욕망, 연민, 사랑의 등정), 감정의 정치적 확장 가능성을 집중적으로 탐구한 <정치적 감정>, 문학과 공적인 삶의 관계를 다룬 <시적 정의>,  감정과 예술 교육에 대한 저서인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2011), <인간성 수업>(2018)은 크게 보아 모두 하나로 연결돼 있다. 누스바움은 철학적 토대를 단단히 다지는 작업에서 나아가 다양한 지점에서 실천적인 방향으로 자신의 철학을 확장해나간다.

 

누스바움은 아마르티아 센(1998년 노벨경학상 수상)과 함께 GDP와 같은 양적인 성장지표의 한계를 넘어서 감정을 포함한, 개인의 질적 행복을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였는데, 이는 유엔에서 수행되는 빈곤과 불평등 연구, 삶의 질에 관한 국제적 지표 확립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또한 그녀는 '문학'을 통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윤리적, 정치적 감정을 형성할 수 있는지를 전략적으로 검토한다.  그리스 비극, 찰스 디킨스, 월트 휘트먼, 제임스 조이스 등 서구의 유구한 문학적 계보를 경유하여 시적 상상력이 어떻게 공적이고 정치적인 가치로 전환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문학과 예술을 통해 공적 감정을 형성하고 정치적 소양을 함양하는 교육을 실행하여 민주주의 사회를 가꾸는 시민을 길러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번 글에서는 마사 누스바움의 철학이 어떻게 예술 교육에 대한 강조로 귀결되는지를 살펴보았다. 다음 글에서는 문학에 적용된 누스바움의 교육적 방법론을 영화에 적용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과 방법들을 알아보고자 한다.   

 

<감정의 격동>(2015.새물결/ <정치적 감정>(2019).글항아리/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2011).궁리/ <인간성 수업>(2018).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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