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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토니 에드만>-(1)빈프리트는 왜 토니 에드만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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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에드만>이미지. 빈프리트와 이네스ⓒ2016.그린나래미디어(주).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토니 에드만>의 복수성과 정치성

 

<토니 에드만>은 얼핏 보면 장난기 많은 괴짜 아버지와 워커홀릭 딸이 갈등하고 화해하는 가족 드라마 같다. 하지만 <토니 에드만>은 뜯어 볼수록 난해한 텍스트이다. 가족 드라마의 외형에 세대, 계급, 젠더 등 중층적인 주제들을 포개어 놓아 평면적으로 해석하기가 힘든 영화이다. 또 그만큼 해석의 깊이에 따라 풍성한 의미와 감정들을 끌어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토니 에드만>이 누스바움의 감상법을 적용하기에  훌륭한 작품인 이유는 관객 각자의 관점과 관심사에 따라 상이한 방향으로 읽힐 수 있는 (단수가 아닌)복수의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이 때 복수성이란 누군가에게는 <토니 에드만>이 세대에 대한 영화로, 누군가에는 계급에 대한, 누군가에게는 젠더에 대한 작품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토니 에드만>에서 그 모든 카테고리들을 종합하는 단수의 명제를 추론해내는 것은 사실상 힘들다. 종합적인 해석을 찾기 보다는 관객 각자의 독법에 따라 영화를 감상하고 다양한 사람들의 감상을 함께 공유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 아닌가 싶다. 누스바움은 독서의 과정은 결국 독자들 사이의 대화를 통해 완성된다고 말한다. 누스바움의 감상법은 그런식으로 영화를 분석해서 하나의 그림을 찾으려 하기 보다 여러 사람들이 가진 조각들을 이리 저리 모자이크해가며 영화 자체의 것을 넘어서는 다른 그림들을 그리는 방식이다.  

 

복수성의 측면에서 보면, <토니 에드만>을 정치적 방향성이 모호한 포스트 모던 텍스트로 볼 법 하지만 그렇게 규정하기는 힘들다고 본다. 오히려 <토니 에드만>은 오늘날의 세계에 대한 압축적인 단면도이자 앞으로의 세계에 대해 강력한 정치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토니 에드만>은 어떤 결론에 도달하는 대신 이 세계를 문제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다분히 정치적이다. 

 

빈프리트의 장난이 가진 의미1: 은폐의 가면 

 

<토니 에드만>이미지. 우편배달부와 빈프리트ⓒ2016.그린나래미디어(주).

관객으로서 나에게 가장 핵심적인 물음은 빈프리트의 장난이 가진 의미가 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는 왜 그런 장난과 기행을 일삼으며 유령처럼 이네스의 주변을 배회하는가. 영화가 시작하면 빈프리트의 집 앞을 카메라가 비추고 곧이어 우편 배달부가 빈프리트에게 택배를 전한다.  빈프리트는 이 때 그 택배가 동생 토니가 시킨 우편물이라며, 토니를 부른다. 빈프리트는 토니가 우편물 폭탄 때문에 감옥에 갔다가 얼마전 출소했다고 말한다. 이어서 치아가 과장되게 튀어나온 남자, 토니가 등장하는데, 물론 이는 빈프리트의 장난이다. 그는 토니로 분장한채로 배달부의 당황스런 반응을 즐긴다. 이것이 빈프리트가 첫번째로 토니로 변장한 장면이다. 토니는 과격하고 대범한 사내이며 토니로 가장하는 빈프리트는 유쾌하고 넉살좋은 노년의 남자로 보인다. 

 

<토니 에드만>이미지. 해고당하는 빈프리트ⓒ2016.그린나래미디어(주).

 

하지만 곧이어 빈프리트가 찬 혈압계에 경고음이 울린다. 이어서 빈프리트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던 루카스가 찾아와, 시간 여유가 없어 레슨을 그만두겠다는 통보를 한다. 영화는 빈프리트의 여유와 유쾌함을 곧바로 상쇄시킬 요량인듯 그가 직면한 현실을 보여준다. 고혈압에 시달리며 어린 소년에게 해고 통보를 받는 불안정한 건강과 고용의 현실 말이다.             

 

<토니 에드만>이미지. 빈프리트와 이네스의 만남ⓒ2016.그린나래미디어(주).

 

빈프리트가 토니로 분장하는 두번째 상황은 딸 이네스와 대면할 때다. 그는 오랜만에 만난 딸 앞에서 토니의 트레이드 마크와 같은 틀니를 천연덕스럽게 장착한다. 이때 앞 뒤의 상황들이 중요하다. 이네스의 새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는 집에는 그녀의 생일을 미리 축하하기 위해 친인척들이 모여 있다. 한데, 빈프리트는 딸의 생일 파티라는 것 조차 모른채 불청객처럼 이네스와 대면한다. 이네스가 상하이 출장에서 다국적 기업의 관리자들을 만나고 돌아왔다는 정보를, 빈프리트는 그녀의 새아버지로 부터 듣는다. 이처럼 빈프리트는 딸 이네스의 사회적 관계와 정보(그녀의 근황)로부터 소외돼 있다. 가족주의를 중요시 여기는 독일에서 빈프리트는 가족으로부터 소외돼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멋쩍게 딸을 맞이한 빈프리트는 무의식적인듯 자연스레 틀니를 낀다. 생일인줄 몰랐다며, 곧 부쿠레슈티(루마니아의 수도로서 이네스가 일하는 컨설팅 회사의 지부가 부큐레슈티에 있음)에 갈 일이 있으니 그 때 선물을 주겠다는 말을 덧붙이며 말이다. 그 때 역시 빈프리트의 협압계에 경고음이 울린다.  

 

 첫번째 (토니로의)변신이 단순한 장난으로 비쳤다면 두번째 변신을 통해 관객은 빈프리트가 어떤 방어적 무의식의 차원(혹은 의식적 차원)에서 장난을 치는게 아닌가 의심할 수 있다. 불청객으로 딸을 맞는 그는 상대적 약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유쾌한 사내인 토니의 얼굴로 은폐한다. 우스꽝스런 가면을 쓰고 현실을 유희적으로 회피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영화에서 반복과 그 반복의 변주는 중요한 의미를 함축한다. 그것들이 내포작가가 강조하고자 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반복되는 빈프리트의 변신은 두번째 변신에서 품었던 의심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토니 에드만>이미지. 토니로 변신한 빈프리트ⓒ2016.그린나래미디어(주).

   

<토니 에드만>이미지. 비즈니스 리셉션에 참석한 빈프리트ⓒ2016.그린나래미디어(주).

 

<토니 에드만>이미지. 리셉션 뒷풀이에 있는 빈프리트ⓒ2016.그린나래미디어(주).

빈프리트가 예고한대로 이네스가 있는 루마니아의 부큐레슈티에 방문한 이후의 상황들을 보자. 그는 부쿠레슈티에서 여러차례 토니 로 변신하고 특유의 뻐드렁니를 드러낸다. 위의 이미지들을 보면 그가 변신하는 상황들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 빈프리트는 부큐레슈티에 도착한 뒤 예고 없이 이네스가 다니는 회사 로비에서 그녀를 기다린다. 이네스와 그녀가 컨설팅 하는 석유 기업의 임원들, 그녀의 루마니아인 비서 앙카가 로비를 가로질러 걸어올 때 빈프리트는 토니로 변신한다. 미국 대사관이 개최하는 비즈니스 리셉션에 이네스와 함께 가게 된 빈프리트는 한껏 차려입은 근사한 무리들 틈에서 토니로의 변신을 시도하다 이네스로부터 저지당한다. 리셉션이 끝난 뒤, 이네스가 컨설팅 하는 석유 기업의 대표인 헨네베르크로부터 뒷풀이에 초대받은 빈프리트는 자신에게 이목이 집중되자 틀니를 끼고 토니로 변신한다. 

 

앞선 장면에서 토니는 이네스가 하는 '컨설팅'에 대한 얘기에 "무슨 소린지 받아적어야겠군"이라고 말할 정도로 비즈니스 영역에 관해 문외한이다. 위의 상황들에서 모두 빈프리트는 자신과는 대단히 이질적인 비즈니스 업계의 사람들과 뒤섞인다. 빈프리트는 그들에게 이질적인 타자이다. 낯선 공간인 부큐레슈티에서 수동적으로 상황을 맞아들이고 그에 대한 행동양식을 배워야 하는 빈프리트는 그들을 타자화 시킬 수 없고 오직 타자화 될 뿐이다. 그런데 왜 약자가 아닌 타자인가. 7살 아이를 타이르듯, 비즈니스 리셉션에서 사람들을 대하는 매너를 빈프리트에게 가르치는 이네스는 분명 그보다 상대적 우위에 있다. 아버지와 딸이라는 세대의 관계를 차치하면 말이다. 정확히는 이네스가 빈프리트 보다 계급적인 우위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리셉션장에서 비즈니스를 위해 이네스가 잘 보여야할 석유 기업의 대표 헨네베르크는 이네스와 대화하는데 소극적이다. 자신의 아내에게 "이분이 전문가"라고 이네스를 소개한 뒤 그녀에게 기껏 부탁하는 일이 아내가 쇼핑하는 데 도움을 달라는 것일 뿐이다. 그에 비해 헨네베르크는 빈프리트가 이네스의 아버지라는 얘길 들은 뒤, 그와 정중히 대화를 나누고 빈프리트를 뒷풀이에 초대까지 한다. 빈프리트를 두고 홀로 뒷풀이에 가겟다는 이네스에게 헨네베르크는 엄숙한 표정으로 아버지와 같이 있어야 하지 않냐고 말한다. 헨네베르크는 이네스에게 사실상 가부장적 훈계를 한 것이다. 가족적 질서에 따라야 하지않냐는 훈계. 이 때 이네스는 젠더적으로 철저히 약자의 위치에 처하고 빈프리트는 상대적인 우위를 점한다. 그는 계급적으로는 딸보다 열위에 있지만 아버지로서 세대의 우위와 젠더적인 우위에 서 있기 때문에 관계의 양상에 따라 약자가 됐다가 강자가 된다. 이네스는 그 반대의 경우에서 때에 따라 상대적인 우열을 점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빈프리트의 변신은 단순한 장난으로 보기 힘들다. 그는 앞서의 의심과 같이 이질적인 상황과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상대적 열위를 숨기기 위해 토니로 변신한다. 물론 이것은 지나치게 일반화된 해석일 수 있다. 그의 즉흥적인 장난끼 전부를 그런 일반화된 틀에 끼워 맞출 수는 없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상황들의 전후 맥락을 보면 그의 장난이 분명 어떤 심리적 방어기제와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을 자연스레 추론할 수 있다. 그런데 이후에 벌어지는 상황들은 그의 변신이 또한 그런 심리적인 차원으로 환원할 수 없는 복합적인 의미를 갖고 있음을 드러낸다.

 

<토니 에드만>이미지. 토니 에드만의 모습ⓒ2016.그린나래미디어(주).

빈프리트의 장난이 가진 의미2: 동물성의 표현  

 

빈프리트는 이네스와 다툰 후 독일로 돌아가는 시늉을 한다.  그는 실제로는 독일로 가지 않고 '토니 에드만'으로 변장하고 이네스의 주변을 배회한다. 빈프리트의 토니 에드만으로의 완전체적 진화는 외양으로 보면 인류의 진화에 역행한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부터 오늘날 인류의 조상인 호모사피엔스까지, 인간은 치아는 작아지고 털이 빠지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실제로 진화의 초기단계에서 인간은 불을 사용하지 않고 질긴 생고기를 뜯어 먹어야 했기에 치아가 크게 발달했고, 태양에서 오는 열을 차단하기 위해 털도 무성했다. 하지만 인류의 활동 반경이 넓어지며 땀이 많아져, 이를 빨리 배출해야 했기에 털이 줄어드는 방향으로 진화했다고 한다. 진화가 진행될수록 기능적으로 쓸모가 줄어든 치아는 작아지고 털도 대부분 빠지게 되었다. '토니 에드만'은 진화 초기의 원시인처럼 치아가 비대하고 머리털이 무성하다.  그는 세련된 도시인의 외양과는 거리가 멀고 동물적인 형상(물론 머리털은 진화과정에서 퇴화하지 않았지만 토니 에드만의 다듬어지지 않은 산발의 머리는 털이 무성한 동물적 형상을 연상시킨다. 빈프리트가 종국에는 온 몸이 수북하게 털로 덮인 존재로 변신하는 것은 그 연장선에 있을 것이다.)에 가깝다. 

 

<토니 에드만>이미지. 갑자기 이네스 앞에 나타난 토니 에드만ⓒ2016.그린나래미디어(주).

 

토니 에드만은 갑작스레 이네스와 그녀의 상류층 친구들 앞에 등장한다. 이네스의 친구인 타티아나는 중국인 투자자들에게 아파트를 팔았다는 얘기를 하고 스테프는 곧 출시할 웹사이트 행사에 이네스의 고객인 헨네베르크를 초대해야겠다고 말한다. 그때 등장한 불청객 토니 에드만은 자신을 라이프 코치라고 소개하며 그의 유별난 치아를 농담거리로 삼는다. 그가 음식을 먹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이네스의 친구 스테프는 "정말 역겹다"며 얼굴을 찌푸린다. 리무진이 대기한다며 가야겠다고 인사를 하는 토니에게 명함을 건넨 스테프는 그가 사라진 뒤, "봤지? 명함도 없나 봐"라고 조소한다. 이네스의 무리와 토니는 철저히 이질적이다. 그녀들은 그럴듯한 명함을 지닌 채 비즈니스를 이야기하지만 토니 에드만은 비대한 치아와 거북이에 대한 우스개 소리를 화제로 삼는다. 그는 비즈니스의 생태계 밖에 있는 동물적인 존재이다. 토니 에드만에게는 비즈니스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는 아이디 카드가 부재하다. 그래서 이네스의 친구들은 라이프 코치라는 그의 직업을 믿지 않는다.            

 

여전히 우리 인간 삶의 많은 부분은 이와 유사한 혐오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몸에서 냄새를 씻어내고, 몸과 얼굴의 털을 제거하고 우리 사지를 옷으로 가리며, 생식기 및 배설활동을 각별히 신경 써서 숨긴다... 동물성에 대한 혐오라는 이토록 오래된 감정을 우리는 아직까지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마사 누스바움 <정치적 감정>(2019). 글 항아리. P.225.

마사 누스바움의 말대로 문명화된 인간세계는 동물성의 요소들, 즉 죽음, 성, 배설활동 등을 어떻게든 비가시화 시키려 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 같은 요소들이 가시화될 때 문명화된 인간은 혐오의 감정을 지녀왔다. 이네스와 그의 주변인들이 활동하는 세련되고 우아한 비즈니스의 세계는 그러한 동물성과 대척점에 서 있다. <토니 에드만>은 이네스의 생일파티로 시작하여 그녀의 할머니의 죽음으로 끝맺음된다. 빈프리트가 부쿠레슈티에 찾아온 이유 중 하나는 애완견 빌리가 죽었기 때문이다. 필연적 동물성인 노화와 죽음은 영화 속에서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다. 이네스가 그녀의 직장동료이자 애인과 벌이는 다소 도착적인 성행위는 외부로부터 철저히 차단된 사적 공간에서만 은밀히 행해질 수 있다.  이네스는 중요한 회의전에 하얀 와이셔츠에 묻은 (이네스의 발톱에서 나온)피를 불길하게 바라본다. 동물성의 상징인 피는 비서인 앙카의 새 와이셔츠로 깨끗하게 가려진다.  물론 그 같은 것들의 은폐는 문명화된 사회의 기본 질서를 위해 필요하다.  하지만 마사 누스바움은 인간의 동물성에 대한 지나친 혐오가 공적인 삶을 위해 중요한, 연민을 함양하는데 큰 장애물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동물성의 중요한 부산물 중 하나로 인식되는 것이 또한 감정이다. 

 

이러한 마음의 격동이 샤를뤼스 씨의 정신을 얼마나 동요시키며, 또 그때문에 일시적으로 그의 정신활동을 풍요롭게 했는지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처럼 사랑은 참으로 상념의 지형학적 융기를 일으킨다. 샤를뤼스씨의 정신은 며칠 전만 해도 매우 평탄한 벌판과 비슷해 아주 멀리 지면과 같은 높이에 한 덩어리의 관념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거기서 난데없이 바위처럼 단단한 산악 지대가, 어떤 조각가가 거기로 대리석을 나르러 가는 대신 그 자리에서 끌로 새기기라도 한 듯 분노, 질투, 호기, 부러움, 미움, 괴로움, 거만, 공포와 사랑의 거대하고도 거창한 군상으로 꿈틀대는 산악 지대가 우뚝 서 있었다.

-마르셀 푸르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8권 '소돔과 고모라' P.445 (마사 누스바움. <감정의 격동-1. 인정과 욕망>에서 재인용)  

 

<토니 에드만>이미지. 감정 코치에게 화상으로 상담을 받는 이네스ⓒ2016.그린나래미디어(주).

 

누스바움은 감정에 대한 프루스트의 은유에 주목한다. 프루스트의 표현대로 감정은 '상념의 지형학적 융기'로 보인다. 평탄한 벌판이 요동쳐 거친 산악지대가 될 만큼 감정은 인간을 뒤흔들고 외부적인 것에 취약하게 만든다. 동물의 감정은 인간만큼 복합적이진 않기에 감정을 동물성과 등치시키긴 힘들다. 하지만 감정을 이성의 벌판을 뒤흔드는 상념의 융기로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감정을 동물성과 비슷한 범주에서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이네스는 화상대화를 통해 감정 코치(혹은 라이프 코치)에게 업무와 회의에 임하는 마음가짐에 대해 코칭을 받는다.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가 <감정 자본주의>(2010)에서 언급했듯, 현대 기업의 관리자에게 매우 중요한 과제는 (자신과 직원들에 대한)감정의 관리다. 그 관리는 단순히 감정의 절제나 억압을 뜻하는 게 아니라 감정의 표출과 능숙한 표현을 위한 것이다. 

 

에바 일루즈. <감정 자본주의>표지ⓒ2010.돌베개.

 

현대 기업의 구성원들은 이런저런 감정적 트러블에 시달리고 이는 기업경영의 큰 리스크로 작용한다. 하여 감정의 관리는 핵심적인 매니지먼트의 영역으로 진입했다. 그러니 현대 자본주의에서 가부장적이고 과묵한 관리자는 무능한 사람으로 인식된다. 날것이 아닌 필터링되고 정제된 감정을 효과적으로 구사하는 것이 기업 관리자의 중요한 자질이 되었다.  이네스는 호흡과 바디 랭귀지같은 내밀한 감정의 영역까지 정기적으로 컨설팅 받는다.  그녀는 컨설팅에 따라 비즈니스의 영역에서 적절하고 알맞은 감정과 태도로 타인을 응대한다. 이네스의 일상적인 무표정함은 감정의 결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이네스는 일의 효율성을 위해 감정을 비즈니스와 생활의 영역에 전략적으로 배분하는 것일 뿐이다. 빈프리트의 가면은 드러내는 가면이며 이네스의 가면은 감추는 가면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은 상황을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빈프리트의 가면은 드러내는 동시에 그의 현실을 은폐하며 이네스의 가면은 본심을 은폐하는 동시에 그녀의 전략을 드러낸다. 

         

 

반면 토니 에드만은 여러모로 이네스 그리고 그녀의 세계에 속한 사람들과 대척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네스가 그녀의 상사이자회사의 대표(루마니아 지부의 대표)인 게랄트와 회사 옥상에서 업무상 중요한 얘기를 나눌 때 토니는 방귀 쿠션에 앉아 방귀소리를 내는 장난을 친다. 그는 이네스와 함께 방문한 부저우(루마니아 남동부의 도시로 영화상에서는 석유시추 공장이 위취한 장소이다.)에서 급한 볼일을 사방이 보이는 숲속에서 보려고 한다. 토니 에드만은 날것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정제되지 않은 언어를 사용해 상대를 당황하게 만들고 상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얘기들(가령 비즈니스 파티에서 치즈 강판 쓰는 법에 대해 얘기하는 등)을 천연덕스레 늘어놓는다. 그는 친분도 없는 이의 사적인 모임에 불쑥 찾아간다. 이것들은 어찌보면 교양의 결여를 의미하고 다른 측면에선 문명의 세계와 비즈니스의 세계가 마련해 놓은 규칙들, 때로는 위선과 허위의식을 그럴듯한 포장지로 감싼듯한 그 규칙의 질서를 교란하고 횡단하는 동물적 몸짓이다. 영화의 후반부, 이네스의 생일파티에 거대한 털복숭이 불가리아 가면을  쓰고 등장한 토니의 모습에서 그의 동물성은 극대화된다. 그 모습은 그야말로 동물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토니 에드만>이미지. 불가리아 가면을 쓴 빈프리트ⓒ2016.그린나래미디어(주).

 

빈프리트가 토니 에드만으로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까지 그의 가면은 어느 정도는 장난으로 보였고 자신의 약함을 은폐하려는 수단으로 해석됐다. 하지만 토니 에드만이라는 가면은 그와는 다른 의미를 내포한다. 그것이 단지 약함을 은폐하고 자신을 강하게 가장하려는 수단이라면 왜 그 가면은 그토록 우스꽝스러운가. 심지어 그것은 타인의 혐오를 부르고 사회적 공간에서 배제되길 자처하는 가면이다. 토니에드만이란 가면은 은폐의 용도라기 보다는 오히려 동물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의 매체로 보인다. 빈프리트는 단지 표현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네스를 그런 동물성의 세계로 인도하고자 애쓴다. 빈프리트의 관점에서, 인생의 행복보다는 일의 성취에만 골몰하는듯 보이는 딸의 삶에, 그는 그런 방식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빈프리트는 한껏 경직돼 보이는 딸의 세계를 배회하며 그녀에게 날것의 감정을 표출하는 법을 가르치고 계획되지 않은 변칙과 즉흥, 취한 자의 비틀거림같은 대책없는 삶의 유희를 전해주고자 한다.     

 

<토니 에드만>이미지. 노래를 열창하는 이네스/ 파티를 준비하는 이네스ⓒ2016.그린나래미디어(주).

 

놀라운 것은 빈프리트의 그런 의도에 반응하는 이네스의 변화다. 갑작스레 방문한 낯선이들의 모임에서 이네스는 토니의 종용에 못이기는 척 휘트니 휴스턴의 'greatest love of all'을 열창한다. 고음과 삑사리의 경계에서 맴도는 이네스의 위태로운 열창은 가사를 부른다기 보다는 날것의 감정을 토해내는 일에 가까워 보인다. 이네스는 집에서 열리는 자신의 생일파티에 직원들을 초대하는데, 그녀는 갑작스레 입고 있던 옷을 훌렁 벗어던지고 나체파티를 감행한다. 문명적인 규칙의 붕괴에 처해 혼란해 하는 사람들의 반응으로인해, 이 파티는 음란하기 보다는 괴상하고 우스꽝스런 느낌을 자아낸다. 현대 자본주의의 첨병이라 할 수 있는, 다국적 컨설팅 회사의 직원들이 벌이는 나체 파티에 기이한 털복숭이가 합류하는 이 시퀀스는 극단의 동물성과 극단의 (다국적 컨설팅 회사의 존재가 지닌)합리성이 공존하는 거대한 역설과 농담에 다름 아니다. 또한 토니 에드만의 동물성을 또 다른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이 글은 빈프리트의 장난과 기행에 관해 어떤 가치판단을 하는 내용이 아니다. 단지 영화를 경유해서 그의 가면쓰기가 가진 복합적인 의미를 분석했을 뿐이다. 다음 글에서는 정치, 사회적인 차원에서 토니 에드만이라는 그의 가면이 가진 또 다른 함의와 그런 지평에서 <토니 에드만>을 어떻게 감상할 수 있을지를 역사와 결부지어 얘기해보려한다.   

 

<토니 에드만>이미지. 빈프리트와 그의 어머니ⓒ2016.그린나래미디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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